처음 달라루안을 열던 날의 기억
홍대 근처의 작은 위스키 바에서였습니다. 바텐더가 불쑥 내민 병에는 낯선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The Lost Distillery Company — Dalaruan". 이름부터 범상치 않았습니다. '사라진 증류소 회사'라는 뜻이니까요. 이건 도대체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위스키란 말인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코를 가져다 대는 순간, 그 의문이 쏙 들어갔습니다. 파도 소리가 들릴 것 같은 해염(海鹽)의 기운, 나무 연기처럼 스며드는 피트 향, 그리고 뒤에서 따라오는 달콤한 사과와 살구 향. 스프링뱅크를 처음 마셨을 때의 그 묘한 설렘이 다시 올라왔습니다.
오늘은 그날 이후로 제가 여러 차례 마시며 기록해온 달라루안(Dalaruan)의 시음기를 공유해드리겠습니다. 클래식 셀렉션과 빈티지 셀렉션을 모두 시음했으니, 어느 것을 선택할지 고민 중이신 분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로스트 디스틸러리 컴퍼니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증류소들을 되살리는 프로젝트
로스트 디스틸러리 컴퍼니(The Lost Distillery Company)는 스코틀랜드 킬마녹(Kilmarnock)에 본사를 둔 위스키 브랜드로, 디아지오 출신의 스콧 왓슨(Scott Watson)과 브라이언 우즈(Brian Woods)가 공동 설립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단 하나, 100년 전 문을 닫은 증류소들의 위스키 맛을 현대에 재현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맛을 재현한다고 하면 그냥 비슷한 위스키를 섞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회사의 접근법은 생각보다 훨씬 철저합니다. 전문 아카이빙팀이 각 증류소의 기록을 수집해 물의 출처, 보리 품종, 효모, 매시 툰 재질, 포트 스틸의 크기와 형태, 숙성에 쓰인 캐스크 종류 등 10가지 핵심 요소를 분석한 뒤, 이를 가장 근접하게 구현할 수 있는 5~10종의 현존 싱글몰트를 블렌딩하여 재현 위스키를 만들어냅니다.
🔬 로스트 디스틸러리의 재현 방법론
냉각 여과(Chill Filtration)는 한 세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스트 디스틸러리는 모든 라인업에 냉각 여과를 적용하지 않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최우선으로 하는 진정성 있는 접근입니다. 또한 브랜드 로고로 사용된 켈트 고대 기호 '트리스켈(Triskele)'은 환생과 재탄생을 의미하며, 이것이 곧 이 브랜드가 추구하는 철학이기도 합니다.
출처: Master of Malt — The Lost Distillery Company라인업 구성
로스트 디스틸러리의 달라루안은 크게 세 가지 라인업으로 출시됩니다. 가장 접근하기 쉬운 클래식 셀렉션(Classic Selection, 43% ABV), 좀 더 높은 숙성 원액을 사용한 빈티지 셀렉션(Vintage Selection, 46% ABV), 그리고 매우 희귀한 고숙성 원액으로 구성된 프리미엄 라인인 아키비스트 컬렉션(Archivist Collection)이 그것입니다. 이번 시음기에서는 클래식과 빈티지 두 가지를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달라루안 증류소의 역사 — 흥망성쇠의 100년
한 명의 수레 장인이 일으킨 위스키 왕국
달라루안(Dalaruan) 증류소의 이야기는 한 편의 소설처럼 시작됩니다. 1825년, 이동식 수레를 만들어 팔던 장인 찰스 콜빌(Charles Colvill, 1770~1838)이 아일라 섬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같은 호텔 방을 쓰게 된 주세관 직원으로부터 위스키 산업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하룻밤의 대화가 그를 완전히 바꿔놓았고, 그는 동업자들을 모아 스코틀랜드 남서부 캠벨타운(Campbeltown)에 달라루안 증류소를 세웠습니다.
달라루안의 물은 크로스힐 록(Crosshill Loch)에서 공급받았는데, 이 호수는 아가일 공작이 캠벨타운 증류소들의 창업을 장려하기 위해 인공으로 조성한 것입니다. 호수를 채우는 물은 벤 길란(Beinn Ghuilean) 산 위쪽의 석회암층을 통과해 흘러내려오는 것으로, 석회석이 미네랄을 더하고 불순물을 걸러줬습니다. 증류소 부지에는 사설 우물도 두 곳 있었는데, 1887년 알프레드 바너드(Alfred Barnard)가 방문해 "최고 품질의 천연 샘물"이라고 기록할 만큼 수질이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
캠벨타운의 황금기와 달라루안의 성장
달라루안은 설립 초기부터 성장세가 가팔랐습니다. 1826년 생산량이 14,295 갤런에 불과했던 것이 1885년에는 112,000 갤런으로 거의 8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한때 캠벨타운에는 34개의 증류소가 가동되며 이 지역이 '위스키의 수도(Whisky Capital)'라고 불릴 만큼 번성했습니다. 달라루안은 3중 증류(Triple Distillation)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위스키를 만들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블렌디드 위스키인 그린리스 브라더스(Greenlees Bros.)의 '로른(Lorne)' 블렌드의 핵심 원액이기도 했습니다.
1896년 7월 새벽 1시, 동쪽 킬른에서 발화된 불이 마구간과 곡물 창고까지 번지며 증류소 전체를 위협하는 대형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항구에 정박 중이던 군함 HMS 노샘프턴(HMS Northampton)의 야간 경계병이 불길을 발견해 신고하지 않았다면 완전히 전소될 뻔했던 아찔한 사건이었습니다.
캠벨타운의 몰락과 달라루안의 종말
1920년대, 캠벨타운에는 완벽한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과잉 생산으로 인한 품질 저하, 미국의 금주법(Prohibition), 전후 세금 인상, 그리고 블렌디드 위스키 제조사들이 캠벨타운 대신 스페이사이드(Speyside) 몰트를 선호하기 시작한 것이 겹쳤습니다. 달라루안은 1925년 경매에서 매각되며 폐업했고, 5년 안에 건물이 모두 철거되어 지금은 '파를리먼트 플레이스(Parliament Place)'라는 주거단지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34개였던 캠벨타운의 증류소는 현재 단 3개만 남아있습니다.
출처: The Lost Distillery Company 공식 홈페이지 — Dalaruan Distillery 출처: The Spirits Business — Lost Distillery Co adds Campbeltown Scotch달라루안 라인업 & 스펙 정리
클래식 셀렉션 (Classic Selection)
| 타입 | 블렌디드 몰트 스카치 위스키 |
| 도수 | 43% ABV |
| 용량 | 700ml |
| 숙성 캐스크 | 엑스-셰리 캐스크 + 엑스-럼 캐스크 |
| 냉각 여과 | 없음 (Non-chill filtered) |
| 색소 첨가 | 없음 (Natural colour) |
| 가격대 | 약 USD 45~55 (2022년 기준) |
| 수상 이력 | Scotch Whisky Masters — Gold |
빈티지 셀렉션 (Vintage Selection)
| 타입 | 블렌디드 몰트 스카치 위스키 |
| 도수 | 46% ABV |
| 용량 | 700ml |
| 숙성 캐스크 | 희귀 고숙성 싱글몰트 블렌드 |
| 냉각 여과 | 없음 (Non-chill filtered) |
| 색소 첨가 | 없음 (Natural colour) |
| 특이사항 | 왁스 씰, 개별 넘버링, 우드 케이스 포함 |
클래식 셀렉션 시음 기록
글라스에 담기 전부터 시작되는 기대
코르크를 뽑는 순간부터 묘한 긴장감이 생깁니다. 과연 100년 전 사라진 증류소의 맛이 어느 정도나 구현되었을까, 하는 궁금증 때문입니다. 글라스에 따르면 색상은 진한 앰버, 오렌지와 갈색이 뒤섞인 어두운 황금빛입니다. 색소 첨가 없이 이런 색이 나온 건 셰리 캐스크와 럼 캐스크의 영향입니다.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처음 글라스에 넣었을 때 코를 바로 잔 중앙에 들이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초반에는 알코올 증기와 함께 약간의 바니쉬(varnish) 계열의 날카로운 향이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잔의 테두리 쪽으로 코를 천천히 가져가면 훨씬 풍성한 아로마를 즐길 수 있습니다. 10~15분 정도 브리딩(breathing) 시간을 주면 더욱 좋습니다.
노즈 (Nose)
브리딩 후 코를 가져다 대면 가장 먼저 해염(Sea Salt)과 흙내 나는 허브 계열의 피트가 옵니다. 섬 지역의 바람처럼 스며드는 연기 향이 베이스를 깔면서, 그 위로 사과·살구·서양배 같은 오차드 프루트(과수원 과일)의 싱그러운 향이 따라옵니다. 잠시 후 캐모마일 티와 허브 계열의 채소 향이 올라오고, 럼 캐스크의 영향인지 은은한 열대 과일 뉘앙스도 느껴집니다. 전체적으로 피트하면서도 과일 향이 조화를 이루는 전형적인 캠벨타운 스타일입니다.
팔레트 (Palate)
입에 넣는 순간 미디엄 바디의 질감과 함께 해안 지역 특유의 짭조름한 코스털(Coastal) 풍미가 먼저 인사를 건넵니다. 그다음 노즈에서 약속했던 사과와 살구가 입안에 부드럽게 퍼지고, 맥아 당분의 달콤함이 중반부를 채웁니다. 끝 무렵에는 피트 스모크가 다시 살아나면서 부드러운 스파이시함이 가세합니다. 43% 도수답게 알코올 자극은 비교적 순한 편이며, 가볍게 물을 한 두 방울 더하면 플로럴한 면이 더 살아납니다.
피니쉬 (Finish)
피니쉬는 미디엄-롱 길이로, 드라이하고 허브 계열의 여운이 기분 좋게 이어집니다. 마지막에는 잔잔한 바다 바람처럼 해염과 약간의 후추 스파이시함이 남으며,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정직한 마무리를 보여줍니다.
Color
진한 앰버, 오렌지&갈색이 섞인 어두운 황금빛
Nose
해염·허브 피트, 사과·살구, 캐모마일, 은은한 열대 과일
Palate
미디엄 바디, 코스털, 사과·살구, 맥아 당분, 부드러운 스파이시
Finish
미디엄-롱, 드라이, 허브, 해염, 후추
가수 시
플로럴·허브 계열이 더 선명해지고 전체적으로 부드러워짐
수상
Scotch Whisky Masters Gold 수상
스코틀랜드 최고 위스키 전문가 찰스 맥린(Charles MacLean)은 달라루안 클래식을 "가볍고 접근하기 쉬우며, 달콤하고 해양적인 맛에 따뜻한 피니쉬와 후추 힌트가 따라온다"고 평했습니다. — Drink Me Magazine (출처: Drink Me Magazine)
개인적인 총평을 드리자면, 클래식 셀렉션은 캠벨타운 스타일 입문용으로 손색이 없는 위스키입니다. 스프링뱅크나 글렌스코샤를 즐기는 분들이라면 익숙한 바탕 위에 새로운 스토리를 얹어서 마실 수 있는 즐거움이 있고, 이 스타일을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도 43%의 접근하기 좋은 도수와 균형 잡힌 풍미가 좋은 관문이 될 것 같습니다.
빈티지 셀렉션 시음 기록
같은 증류소, 다른 차원의 경험
빈티지 셀렉션은 클래식보다 훨씬 프리미엄한 포지셔닝입니다. 우드 케이스에 담겨 있고, 병에는 왁스 씰이 씌워져 있으며 개별 넘버링이 되어 있습니다. 매우 희귀한 고숙성 싱글몰트들을 블렌딩한 만큼, 병을 여는 것부터 이미 특별한 의식 같은 느낌이 납니다. 도수도 46%로 올라가면서 훨씬 풍성한 표현력을 기대하게 됩니다.
노즈 (Nose)
클래식에 비해 훨씬 깊고 농밀한 인상입니다. 첫 향은 마누카 꿀(Manuka Honey)과 건조 과일이 주도하며, 그 아래에 나무 연기와 후추가 은은하게 깔립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진한 이국적인 과일 향이 열리고, 오크와 바닐라의 부드러운 층이 더해집니다. 럼 캐스크에서 온 열대 과일 느낌이 클래식보다 훨씬 또렷하게 살아납니다.
팔레트 (Palate)
입 안에서 기름진(Oily) 질감이 먼저 느껴집니다. 풀 바디에 가까운 무게감, 그리고 짭조름한 바닐라 퍼지가 뒤따릅니다. 과일 향이 다시 살아나고, 토스트한 아몬드와 스파이스가 중반부를 채우며, 마지막엔 훈연 향이 다시 돌아오며 긴 여운을 예고합니다. 클래식보다 훨씬 레이어가 두껍고 복잡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피니쉬 (Finish)
피니쉬는 길고 따뜻합니다. 캐러멜, 진저 쿠키, 토스트 브레드 같은 구운 제과 계열의 향이 오래도록 이어지며, 스모크의 잔향이 입 안에서 천천히 사라집니다. 클래식이 바다 바람이라면, 빈티지는 장작불이 있는 방 안 같다는 인상입니다.
참고: Distiller.com — Lost Distillery Dalaruan 테이스팅 노트클래식 vs 빈티지 비교
같은 달라루안 이름을 달고 있지만, 두 제품은 꽤 다른 경험을 제공합니다. 어느 쪽이 더 좋다기보다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지의 문제입니다.
클래식 셀렉션 43%
가볍고 코스털한 스타일. 첫 입문자에게 추천. 캠벨타운 스타일을 처음 경험하고 싶은 분, 여름 저녁 혼자 가볍게 한 잔 마시고 싶을 때 딱입니다. 가성비도 우수합니다.
빈티지 셀렉션 46%
풍성하고 오일리한 스타일. 위스키 경험자에게 추천. 특별한 날 선물이나 컬렉션으로도 손색 없습니다. 클래식에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고 싶을 때 선택하세요.
두 제품 모두 공통적으로 냉각 여과와 색소 첨가가 없다는 점에서 원액 본연의 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점수 (개인 기준)
오해하기 쉬운 것들
오해 1: "블렌디드 위스키니까 저렴한 제품이겠지"
달라루안은 블렌디드 몰트(Blended Malt)입니다. 여기서 '블렌디드'라는 단어 때문에 많은 분들이 그레인 위스키와 섞인 저가 블렌디드를 연상합니다. 하지만 블렌디드 몰트는 100% 싱글몰트들만을 블렌딩한 것으로, 그레인 위스키는 전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달라루안에는 5~10종의 싱글몰트 원액이 사용되며, 이는 블렌디드 스카치와는 전혀 다른 카테고리입니다.
오해 2: "그냥 마케팅용 스토리텔링 아닌가"
과거 증류소를 재현한다는 개념 자체가 허구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스트 디스틸러리의 아카이빙팀은 역사 문서, 배럴 기록, 당대 방문자 노트(알프레드 바너드의 기록 등)를 바탕으로 실제 생산 방법론을 재구성합니다. 물론 100% 동일한 재현은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그 시대 캠벨타운 위스키의 정신을 성실하게 추적한 결과물임은 분명합니다. 실제로 Scotch Whisky Masters에서 Gold를 수상했다는 것이 품질을 방증합니다.
오해 3: "스프링뱅크나 글렌스코샤를 마시면 되지, 굳이 이걸?"
달라루안을 처음 소개받으면 많은 분들이 "그냥 스프링뱅크 마시면 안 되나요?"라고 묻습니다. 물론 스프링뱅크는 위대한 위스키입니다. 하지만 달라루안의 가치는 다른 데 있습니다. 100년 전의 캠벨타운 위스키 문화, 당시 3중 증류 방식, 럼·셰리·비어 캐스크가 함께 사용되던 시대의 블렌딩 철학, 이것들이 현대의 원액과 만났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직접 경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달라루안만의 고유한 매력입니다. 위스키를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역사와 문화로 즐기고 싶은 분들에게 특히 가치 있는 선택입니다.
총평 & 구매 추천 여부
시음을 마치고 빈 잔을 내려놓으며 드는 생각은 하나였습니다. '이런 위스키가 더 있었으면 좋겠다.' 달라루안은 완벽한 위스키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가끔 초반 코에서 느껴지는 알코올 자극이나 클래식 버전의 다소 얇은 바디감은 좋아하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위스키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확실합니다. 1925년에 사라진 캠벨타운의 한 증류소가 100년이 지나 다시 잔 속에 되살아나는 경험. 그것만으로도 달라루안은 충분히 마실 이유가 있는 위스키입니다.
스프링뱅크, 글렌스코샤, 킬케란을 즐기는 분들에게 적극 추천합니다. 캠벨타운 스타일 위스키를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는 클래식 셀렉션으로 시작해서 마음에 든다면 빈티지로 업그레이드하는 루트를 권합니다.
개인 종합 평점 — 5점 만점에 4점 (클래식 기준)
✦ 한 줄 총평
달라루안은 사라진 것에 대한 낭만과 학문적 엄밀함이 공존하는 독특한 위스키입니다. 역사를 마시는 경험을 원하는 캠벨타운 스타일 애호가라면, 이 잔은 반드시 열어봐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