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7/2026
술이 아니라 인문학이었다 — 박병진 《위스키, 스틸 영》 완전 리뷰
책 리뷰 · 위스키 · 인문학
술이 아니라 인문학이었다 — 박병진 《위스키, 스틸 영》 완전 리뷰
2026년 5월 18일 박병진 지음 사계절 출판사
서론 — 위스키 한 잔에 역사가 담겨 있다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처음 이 책 제목을 봤을 때 단순한 위스키 가이드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중에 넘쳐나는 "이 위스키는 피트 향이 강하고, 저 위스키는 셰리 캐스크에서 숙성되었다"는 식의 정보성 책들과 비슷한 책이겠거니 했죠. 표지를 넘기기 전까지는요.
《위스키, 스틸 영》은 달랐습니다. 위스키 제조법도, 시음 노트도, 구매 가이드도 없습니다. 그 대신 이 책에는 아일라 섬의 이름 없는 펍에서 마을 노인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고, 스코틀랜드 깊은 산속 증류소에서 묵묵히 위스키를 빚는 사람들의 신념이 있으며, 버번 위스키 속에 녹아 있는 미국 이민자들의 눈물이 있습니다.
저자 박병진은 IBM과 SAP를 비롯한 국내외 기업에서 30여 년간 임원과 CEO로 일해온 전문 경영인입니다. 2023년 은퇴 이후에는 위스키 칼럼니스트로 전향해 《포브스 코리아》와 《동아일보》에 위스키 관련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동아일보사의 최고위 과정인 '광화문 살롱'의 주임교수로도 활동 중입니다. 그런 그가 10여 년 넘게 세계 각지의 증류소를 직접 발로 뛰며 모아온 이야기를 한 권에 담아냈습니다. 이 책이 단순한 술 안내서가 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맛과 향은 문화적 배경 속에서 만들어지고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홍어의 맛과 향을 이해할 수 없듯이, 우리도 병원 소독약 같은 위스키의 피트 향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 박병진, 《위스키, 스틸 영》 중
이 한 문장이 이 책의 핵심을 압축합니다. 위스키의 맛을 이해하려면 그 땅의 역사를, 그 사람들의 삶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 저는 그 명제를 붙들고 이 책을 끝까지 읽었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엔 위스키 한 잔이 몹시 마시고 싶어졌습니다.
본론 — 《위스키, 스틸 영》을 읽어야 하는 이유
제목에 담긴 철학 — '스틸 영(Still Young)'이 뭔가요?
'스틸 영'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하나는 위스키의 이름이고, 또 하나는 저자 박병진의 삶의 태도입니다.
위스키로서의 '스틸 영'은 스코틀랜드 아일라 섬의 전설적인 증류소 아드벡(Ardbeg)의 장기 프로젝트에서 탄생했습니다. 1998년, 아드벡은 10년 후인 2008년을 목표로 하나의 원액에서 시리즈 위스키를 출시하는 장기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1998년 증류한 원액을 2004년까지 숙성시켜 'Very Young'을 먼저 내놓고, 그로부터 2년 후 같은 원액을 더 숙성시킨 두 번째 위스키를 출시했는데 그 이름이 바로 'Still Young(아직 어리다)'입니다. 이후 'Almost There(거의 다 왔다)', 그리고 마침내 2008년 'Ardbeg Renaissance(르네상스)'를 완성하며 10년의 여정을 마무리했습니다.
삶의 태도로서의 '스틸 영'은 저자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박병진은 책의 에필로그 제목을 '내 삶의 원동력, 호기심'이라고 붙였습니다. 그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것을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이 자신을 지금까지 끌어온 원동력이라고 말합니다. 은퇴 후에도 전 세계를 누비며 위스키 이야기를 수집하는 그의 모습이 그 '아직 젊다'는 태도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아드벡 증류소와 '스틸 영'의 의미
아드벡은 아일라 섬에서도 가장 강한 피트 향으로 유명한 증류소입니다. 마니아들 사이에서 '괴물 같은 위스키'로 불릴 만큼 개성이 강렬하죠. 그런데 이 증류소가 1998년 장기 프로젝트를 시작한 데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아드벡은 대중성이 부족해 존폐 위기에 놓여 있었고, 그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투자하는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결과는 성공이었고, 오늘날 아드벡은 전 세계 위스키 애호가들에게 열렬히 사랑받는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책을 읽을 이유는 충분합니다.
이 책이 다른 위스키 책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
위스키 관련 책은 시중에 꽤 많습니다. 대부분 시음 가이드이거나 위스키 종류별 특징을 정리한 교과서 형태입니다. 《위스키, 스틸 영》은 그런 책과 근본적으로 접근 방식이 다릅니다.
정보보다 이야기를 선택했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위스키 제조법, 시음 노트, 연도별 특징 같은 내용을 책에서 뺐습니다. 그 대신 위스키를 만드는 사람들, 그들이 살아온 땅과 역사, 그 속에서 위스키가 어떤 의미를 가져왔는지를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냈습니다. 증류소를 방문할 때마다 반드시 근처 로컬 펍에 들러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는 저자의 방식이 책 전체에 스며 있습니다. 덕분에 독자는 차가운 스펙 정보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이야기를 마주하게 됩니다.
CEO의 눈으로 본 '혁신'의 이야기
30여 년간 기업의 경쟁력 향상을 이끌어온 저자는 자연스럽게 증류소들의 경영 방식과 혁신에도 주목합니다. 클래식한 이미지 뒤에 숨겨진 글로벌 위스키 브랜드들의 치열한 혁신 전략을 냉철하게 분석하는 시각은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하기 어려운 관점입니다. 술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경영, 마케팅, 브랜딩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구도자처럼 살아가는 위스키 장인들의 이야기
위스키의 역사는 수도원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위스키(Whisky)'라는 단어 자체가 게일어로 '생명의 물'을 뜻하는 'Uisce Beatha'에서 유래했으며, 라틴어로는 'Aqua Vitae', 즉 '신의 물방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의 명성 있는 증류소 상당수가 깊은 산속 외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이유도 그 수도원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그 증류소에서 만난, 세상에 알려지기보다 묵묵히 자신의 일에 집중하는 장인들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담아냈습니다.
책의 구성 — 5부에 걸친 세계 위스키 기행
책은 크게 5부로 나뉘며, 각 부는 위스키의 주요 산지를 중심으로 구성됩니다. 단순한 지역 소개가 아니라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 그 땅에서 위스키가 어떤 방식으로 자라왔는지를 함께 이야기합니다.
1부 — 아일라 위스키 (Islay Whisky)
스코틀랜드 서쪽 아일라 섬에서 탄생한 위스키들을 다룹니다. 아드벡, 브룩라디, 라가불린 세 증류소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아일라 위스키는 강렬한 피트 향과 바다 내음으로 유명한데, 저자는 그 개성이 그저 기술의 산물이 아니라 섬의 지형과 기후, 그리고 그곳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임을 이야기합니다. 바다와 이탄(피트)이 가득한 땅에서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위스키의 향기란, 결국 그 섬의 냄새라는 것이죠.
2부 — 스페이사이드 위스키 (Speyside Whisky)
스코틀랜드 본토 스페이강 유역의 위스키를 소개합니다. 글렌피딕, 글렌파클라스, 글렌리벳, 글렌 그란트, 맥캘란이 등장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증류소가 밀집한 스페이사이드 지역의 위스키들은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달콤한 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배경에는 스페이강의 맑은 물과 온화한 기후, 그리고 오랜 증류 전통이 있습니다. 저자는 특히 셰리 캐스크 숙성의 제왕으로 불리는 맥캘란의 이야기를 통해 나무 통 하나가 위스키의 맛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흥미롭게 풀어냅니다.
3부 — 블렌디드 위스키와 서양 근대사
로얄 살루트와 마티니, 그리고 럼과 진의 이야기가 담긴 부분입니다. 저자는 이 챕터에서 위스키와 근대 서양 역사의 접점을 흥미롭게 짚어냅니다. 특히 '서양 근대사의 숨은 주역'이라는 소제목 아래 럼과 진이 어떻게 대서양 무역, 식민지 정책, 전쟁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이 챕터를 읽고 나면 칵테일 한 잔에도 역사가 녹아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납니다. 아일랜드 위스키를 '불사조 같은 생명력'이라고 표현한 저자의 시선도 인상적입니다. 수백 년의 탄압과 고난 속에서도 살아남은 아이리시 위스키의 역사가 그 표현 안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4부 — 일본 위스키의 놀라운 세계
일본 위스키를 다루는 4부는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은 챕터입니다. 야마자키, 요이치 같은 잘 알려진 이름뿐 아니라 이미 사라져버린 전설의 증류소 가루이자와(Karuizawa), 그 부활을 꿈꾸는 코모로(Komoro) 이야기, 그리고 오키나와의 아와모리와 위스키의 경계에 선 특이한 증류주들까지 다룹니다. 일본이 서양의 위스키 기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 세계를 놀라게 했는지를 역사적 맥락에서 풀어내는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스코틀랜드의 기술을 배우러 간 마사타카 다케쓰루(竹鶴政孝)와 그가 사랑한 스코틀랜드 여인 제시 로베르타 카운의 이야기는 읽으면서 마음이 먹먹해지기까지 했습니다.
5부 — 미국 위스키, 눈물과 자유의 맛
버번 위스키로 대표되는 미국 위스키의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버번을 '비주류 이민자들의 눈물'이라고 표현합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새 땅에서 자신들의 방식으로 술을 빚기 시작한 것이 버번의 기원이라는 것, 그리고 그 역사 속에서 짐 빔과 버팔로 트레이스 같은 브랜드들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생생하게 전합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직접 운영한 라이 위스키 증류소 이야기는 이 챕터의 백미입니다. 뉴올리언스 재즈 문화와 위스키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마지막 부분은 음악과 술을 함께 사랑하는 분들이라면 특히 마음에 와닿을 내용입니다.
저자 박병진은 어떤 사람인가
책을 읽기 전에 저자에 대해 조금 알고 시작하면 이 책이 훨씬 더 입체적으로 읽힙니다. 박병진은 30년 넘게 IBM, SAP 등 국내외 굵직한 기업에서 임원과 CEO로 일해온 전문 경영인입니다. 그런 그가 위스키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20여 년 전부터였다고 합니다. 업무차 해외 출장을 다니며 방문하게 된 각지의 증류소에서 메모를 하기 시작했고, 10년 넘게 쌓인 그 기록들이 이 책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2023년 은퇴 이후에는 《포브스 코리아》와 《동아일보》에 칼럼을 연재하며 위스키 칼럼니스트로 활발히 활동 중입니다. 또한 라이프스타일 전문 출판사 '북스 레브쿠헨'과 어린이 창의력 플랫폼 '테일트리 코리아'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말처럼 "유쾌한 N잡러의 삶"을 살고 있는 셈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책 제목과 동일하게 '스틸 영'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은퇴 후에도 더 활발하게 세계를 돌아다니며,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배우는 모습은 책의 에필로그 제목인 '내 삶의 원동력, 호기심'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자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원동력이 새로운 걸 알고 싶어 하는 호기심이다. '아직 젊다'는 말처럼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꼭 서 있어야 하는 곳과 태도가 '스틸 영'이라고 생각했다."
직접 읽으면서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들
책을 읽으면서 메모를 꽤 많이 했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오래 생각하게 만든 대목들을 공유해 드리고 싶습니다.
피트 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섬의 삶을 알아야 한다
아일라 섬의 이탄(피트, Peat)으로 훈연한 보리를 사용해 만드는 위스키는 처음 접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거부감을 느낍니다. 저 역시 처음 아드벡을 마셨을 때 '이걸 왜 마시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자가 설명하는 아일라 섬 사람들의 삶, 끊임없이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대는 거친 자연 속에서 이탄을 연료로 삼아 겨울을 버텨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나니, 그 연기 냄새가 그저 불쾌한 향이 아니라 그 땅과 사람들이 살아온 방식 자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 아드벡을 조금 다르게 마시게 되었습니다.
버번은 이민자들의 망향(望鄕)이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건너온 이민자들이 고국의 증류 기술로 옥수수를 발효시켜 만들기 시작한 것이 버번의 기원이라는 이야기는, 그 달콤하고 진한 향 뒤에 얼마나 많은 그리움과 눈물이 담겨 있는지를 새삼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버번 한 잔이 그 무게만큼 무거워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정관사 The의 무게' — 글렌리벳의 자존심
스페이사이드의 글렌리벳을 다루는 챕터 제목이 '정관사 The의 무게'인 것을 보고 처음엔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읽고 나니 무릎을 칩니다. 스코틀랜드에서 '글렌리벳'이라는 이름을 달고 싶어하는 증류소가 워낙 많아서, 원조 글렌리벳은 자신들만이 'The Glenlivet'이라고 쓸 수 있다는 법적 권리를 얻어냈습니다. 그 'The' 하나가 수백 년의 역사와 자존심을 담고 있다는 이야기는 브랜드와 역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었습니다.
이 책, 어떤 분께 권하고 싶은가
위스키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당연히 읽어야 할 책입니다만, 사실 이 책은 위스키를 전혀 못 마시는 분에게도 권하고 싶습니다. 책 안에서 위스키는 그저 매개일 뿐이고, 실제로는 역사와 사람과 문화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사에 관심이 있으신 분, 서양 문화를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싶으신 분, 경영과 브랜드에 관심 있으신 분, 그리고 '인생 2막'을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고 계신 분들에게도 이 책은 꽤 많은 것을 줍니다. 저자 자신이 그 '인생 2막의 스틸 영'을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결론 — 위스키를 마시기 전에 먼저 읽어야 할 책
이 책이 남긴 것
《위스키, 스틸 영》을 다 읽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오래 묵혀두었던 싱글 몰트 한 병을 꺼내 든 것이었습니다. 전과 달랐습니다. 병 안의 액체가 그냥 술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길과 세월과 그 땅의 이야기를 담은 무언가처럼 느껴졌습니다. 책이 준 가장 큰 선물은 그것이었습니다. 같은 것을 다르게 보게 만드는 힘.
위스키를 이미 즐기고 계신 분들에게는 지금까지 마셔왔던 위스키들을 새로운 눈으로 다시 볼 기회를 줄 책입니다. 아직 위스키를 잘 모르는 분들에게는, 이 책을 읽고 나면 위스키를 마셔보고 싶어질지도 모릅니다. 그게 저자가 바라는 것이기도 하고요.
저자 박병진은 이 책 이후 '위스키, 스틸 영 2'를 준비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그가 아직 책에 담지 못한 이야기들이 더 있다고 하니, 다음 권도 기대가 됩니다. '스틸 영'이라는 이름처럼, 그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 출처 및 참고 링크
알라딘 도서 상세 페이지 — 위스키, 스틸 영 (알라딘)
사계절 출판사 공식 소개 — sakyejul.net
세계일보 저자 인터뷰 (2025.03.01) — segye.com
사계절 출판사 저자 인터뷰 영상 — sakyejul.net 인터뷰
리디북스 전자책 — ridibooks.com
